불교란? 불교 이해하기 첫 시간 [불교 이해하기]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본받아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어 어리석은 생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부처(붓다)'는 산스크리트어 'buddh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로, '깨달은 자'를 뜻한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본받아 그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종교를 만든 사람, 종교의 가르침, 그리고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나의 '종교'가 이루어진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점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되어 어리석은 생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흔히 '부처님 오신날'로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을 기리지만, 정작 불교가 지향하는 바는 그의 탄생 자체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 또한 불교가 갖는 큰 특징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흔히 네 가지 진리, 곧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된다. 삶은 고통이며(苦), 그 고통에는 욕망과 집착이라는 원인이 있고(集), 그 원인을 끊으면 고통도 사라지며(滅), 거기에 이르는 길이 있다(道)는 것이다. 결국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이 붙들고 있는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한 사람의 삶에는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더욱이 누구나 겪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바로 '생로병사'라 부르는 것이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다만, 여기에 대한 태도와 이에 바탕을 둔 삶의 방식은 각자가 결정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좇고 그것을 이루려 애쓰며, 때로는 더 큰 욕망을 욕망하기도 한다. 또한 사람에게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 이것이 지나치면 이에 휘둘리는데, 이를 '집착'이라 부른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하고, 가지지 못한다고 분노하고, 그런 줄 알면서도 놓지 못하기에 끝없는 번뇌에 휩싸인다.

'부처(붓다)'는 산스크리트어 'buddha'를 소리 나는 대로 옮긴 말로, '깨달은 자'를 뜻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욕망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원인을 헤아려, 집착을 끊어내 다시는 거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으나,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윤회의 굴레에 머물러야 한다.
무엇보다 욕망과 마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과 마음에 끌려다니는 '나'가 문제이다. 흥미롭게도 불교는 우리가 그토록 붙드는 그 '나' 역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고 본다. 이를 '무아(無我)'라 한다. 끌려다니는 '나'조차 본래 실체가 없다면, 거기 매달릴 까닭도 없는 셈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질없다', '공허하다'는 말을 자주 쓴다. 불교는 모든 것을 '공(空)'으로 본다. 여기서 공이란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모든 것이 공인가. 불교는 이를 '연기(緣起)'로 설명한다. 세상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조건이 서로 얽혀 잠시 일어났다 사라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그것이 곧 공이다. 그런데도 실체 없는 것을 욕망하고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마치 그것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또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 환영이나 환상에 비유할 수 있는데, 그러한 환상에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삶이라 할 수 있다.
부처란 무엇이 거짓된 삶인지 알고, 인간이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 알며, 그것을 끊어내 다시는 욕망하거나 마음을 두지 않는 존재다. 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이를 이해하고 또 실행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른 자'가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끝없이 정진해 나가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그렇게 현생의 업과 윤회에서 벗어나 진정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바로 그것이 불교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것이 불교가 세계 종교로 자리잡은 가중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여기에서 벗어나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