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 그 순결의 자아 - 다시 생각하다 8

자기에 대한 사랑 또는 자기를 향한 사랑이 곧 '나르시시즘'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타자에게로 끝내 건너가지 못한 자아의 멈춤이다.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정체이고, 정체가 아니라 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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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 그 순결의 자아 - 다시 생각하다 8
나르시시즘, 그 순결의 자아 - 다시 생각하다 8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한 사색과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생각하는 인간을 향해 나아가 보자.

나르시시즘, 곧 자기애(自己愛).

'자기에 대한 사랑' 또는 '자기를 향한 사랑'.

그렇다. 자기를 향한 사랑이 곧 나르시시즘이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향한 사랑, 자기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만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아름다운 한 소년이.

나르키소스(Narcissus)가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다. 가만히. 가만히 있어야 점차 빠져들 수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누군들 아름답지 않을까. 이상적인 비율 하나는 찾아볼 수 있겠지. 그렇게 아주 작은 비율 하나에, 균형에, 질서에 꽂혀 들여다보고, 들여다보면 기필코 사랑에 빠지리라.

그러나 결코 잡을 수 없는 것. 비친다는 것. 비친 내 모습은 하나의 가상이고, 하나의 거짓이다. 존재하지만 영원히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코 잡을 수 없으나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그 아름다운 존재를 스스로 어떻게 부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한낱 신기루일 수 있지만 잡을 수 없고 다가갈 수 없어서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다. 그리움은 그 간극에서 태어나고, 그 그리움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만든다. 무엇보다 아름다워야 신화가 될 수 있다. 비극과 아름다움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을 아리게 만드는 역설을 빚어낸다. 

비극적 자기애 — 비극의 아름다움

나르키소스는 결국 그 물가를 떠나지 못했다. 떠날 수가 없었다. 물속의 자신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즘은 그런 것이다. 성공하지 못한 자아 성장의 은유.

인간의 자아가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에 대한, 자기 것으로 이루어진, 자기만이 아는 자기의 모습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것은 성장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성장'이란 현재의 자기 모습에서 조금 더 나아가거나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내적인 갈등을 겪기도 하고 외적인 갈등을 겪기도 하며, 고통스러운 경험도 하고, 말 못할 고민도 하며, 다 때려치우고 싶은 기분도 버텨내고,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넘어서며, 인관관계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하며 얻는 무언가가 곧 '성장'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장이 아니라 정체이고, 정체가 아니라 성장에 대한 거부이다. 더 나아가지 않겠다며, 더는 간섭하지 말라며 스스로 선을 긋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나르시시즘은 자기 내면의 미숙한 성장이자, 현재의 자기자신에 머물겠다는 불안정한 성장 과정을 드러낸다.

자기 스스로 자기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선언하는 것 — 그것은 동시에 바깥을 향한 문을 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르시시즘은 자기 방어로 이어지고 그 자기 방어는 때론 타인에 대한 단절과 타인을 무시하는 작은 폭력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10화 질문하는 힘, 철학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 [나른하니즘]
‘나른하게 생각하는 방송’ 나른하니즘입니다. 10화의 주제는 철학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것, 바로 ‘질문하는 힘’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철학적 생각을 시작한 저는 철학을 전공하면서 이에 대한 해답을 얻을 것이라 여겼으나, 궁극적으로는 질문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움은 환상을 낳고 — 환상은 집착으로 이어지니

깊은 그리움은 환상을 낳는다. 그 환상이 점점 짙어지면 어느 순간 환영이 되고, 그 환영이 실체를 대신하기 시작한다. 나르키소스가 그랬다. 물속의 자신이 진짜라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것도 인간의 한 모습이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맹목적인 믿음'이 있어야 나르시시즘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어 객관적인 자기 인식이나 반성은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눈이 멀어야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고,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다.

자기 앞에 오아시스의 신기루가 펼쳐져 있다면, 그곳으로 뛰어드는 사람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자들이다. 오랜 목마름에, 오랜 기다림에, 지나친 사랑에 — 나르키소스는 이별이 없는 곳으로 몸을 던졌고, 그곳에서 수선화 하나가 피어났다. 이는 죽음이 아니라 성장의 멈춤이다.

미성숙한 자아의 은유 —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는 애초에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일 수 없는 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직 순수한 자기였다. 모자람도 추함도 없이, 오직 완벽함만이 있는 존재. 자기 자신을 완벽하다 여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충분하다 여긴다면 — 비록 허무맹랑한 믿음이라 해도 — 그것이 곧 나르시시즘이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은 내가 아닌 것들과의 조우이고, 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인정이며, 타자에게로 향한 의지이자 타자로부터 받은 상처의 치유로 이루어진다. 불편함, 쓰라림, 기다림, 설렘 — 그 갈등과 화해의 순간들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진짜 인식이 생겨난다.

자기를 사랑하되, 자기에게서 조금 떨어져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나치게 자기를 안 좋게 보는 것도, 지나치게 자기를 좋게 보는 것도 결국 같은 함정이다. 자기에게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르키소스처럼.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타자에게로 끝내 건너가지 못한 자아의 멈춤임을 되새기며.


자본주의 체제, 도덕은 가능한가? - 다시 생각하다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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